몽골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1967년 4월 18일, 텅하이칭은 중공 총리 저우언라이의 명을 받아 내몽골 자치주에 군사 진주했습니다. 그는 캉성으로부터 “몽골족의 나쁜 놈들은 몽골인 스스로가 잡아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대담하게 총검술을 펼쳐 대검에 피를 묻혀야 한다”는 구호 아래 1968년 공공연히 “몽골인의 손에서 권력을 탈취하라”고 호소하며 몽골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에서 민족자결의 바람이 일자, 몽골족의 민족 해방을 추구하는 ‘내몽골 인민혁명당’(약칭 ‘내인당’)이 장자커우에서 결성되었습니다. 중일전쟁 기간 중 지하로 숨어들었던 당은 전쟁 종결 후 활동을 재개했으나, 1947년 곧바로 해산되었고 일부 당원들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그러나 1966년 중공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자 초원에는 피비린내 나는 ‘내인당 숙청’ 정치 운동이 불어닥쳤습니다. 내몽골의 일본 식민 지배 역사를 추궁하며 그들을 ‘통적(通敵)’, ‘몽골 간첩’이라 몰아세웠고, 민족 해방 추구를 ‘민족 분열’ 조장이라 일컬었습니다.
1968년 중공이 ‘내인당’을 ‘불법 반혁명 조직’으로 공식 규정한 후, 텅하이칭을 필두로 한 내몽골 자치주 혁명위원회는 ‘민족 분열 타격’, ‘계급 투쟁’의 기치를 내걸고 ‘내인당 숙청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미 중공에 의해 강제 해산된 내인당원과 평범한 몽골인들을 모두 ‘내인당원’으로 몰아 대규모로 체포하고 박해했습니다. 몽골 엘리트들을 ‘소수(소련 수정주의자)’, ‘몽수(외몽골과 접촉한 통적자)’, ‘일특(일본 스파이)’ 등의 ‘죄인’으로 몰았으며, 특히 몽골 지도자 우란푸의 지지자들을 겨냥해 ‘우란푸의 검은 선을 파내고 독소를 씻어내자’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 약 150만 명의 내몽골 인구 중 34만 명이 체포되고 2만 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이는 인종 학살이자 문화적 멸절에 가까웠으며 소련의 카틴 숲 학살이나 폴 포트 정권의 크메르 루주에 비견됩니다.
1969년 3월부터 박해받던 내몽골 인민들은 각종 고발장, 청원서, 친족의 유품과 형구 등을 들고 베이징으로 몰려가 중앙 정부에 항의했습니다. 이때는 마침 ‘9대’(중국 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 전야였기에, 마오쩌둥은 대회가 순조롭게 개최될 수 있도록 문혁의 열기를 식히기로 결정했습니다. 내몽골 인민들의 상소 압력 속에서 중공 중앙은 ‘5·22 지시’를 발표하여 억울하게 다친 선량한 사람들을 복권시키도록 했습니다. 내몽골의 분위기는 하룻밤 사이에 바뀌었습니다. 텅하이칭은 공공의 적이 되어 여러 차례 숙청 대회에서 비판을 받았고, 생존자와 유족들의 피눈물 섞인 고발에 직면했습니다.
중공이 내몽골 동부를 동삼성에, 서부를 간쑤성과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할양하여 내몽골을 다시 분할 통치 방식으로 되돌린 후에야 사건은 비로소 진정되었습니다. 텅하이칭 또한 1975년 산둥성 지난 군구 부사령원직으로 전보되었습니다. 1976년 문혁이 끝난 후 ‘내인당 사건’은 역사적 과오로 규정되어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지만, 텅하이칭은 평생 단 한 차례의 형사 처벌도 받지 않은 채 1997년 병사했습니다.
본서는 텅하이칭이 내몽골을 통치하던 시기의 강연과 문혁 후기의 관련 문헌들을 수집하여 전 3권으로 엮었으며, 사료를 바탕으로 새롭게 식자 및 편집했습니다. 중권은 1968년 3월부터 12월까지 ‘내인당 사건’의 ‘숙청’ 행동이 더욱 공고해졌던 시기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내몽골 문혁 아카이브’ 시리즈는 총 5종으로, 이 외에 《내몽골 인민혁명당 관련 정부 문서 및 지도자 강연》(2권), 《내몽골 인민혁명당 역사적 증거 발굴 및 사회 동원》(2권), 《내몽골 투메트 우기 피해자 보고서》(1권), 《내몽골 군구 피해자 및 가해자 기록》(1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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